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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주의료원 김성혁 이사 - 병원의 기억, 그 여름날의 선율
2025-07-04 09:33:40 - 작성자홍보담당자 (ojw308) 조회수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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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기억, 그 여름날의 선율
제주의료원 이사회 김성혁 이사
1910년대 초, 제주에 하나의 병원이 문을 열었다. 그것은 단지 병원을 넘어서, 섬에서의 생명을 지켜주는 불빛이었다. 1912년 8월, 전라남도 제주자혜의원으로 시작한 제주의료원은 시대의 격랑을 지나며 이름을 달리했고, 광복 후 1946년 7월에는 제주도립병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1983년에는 지방공사 제주도 제주의료원으로 전환되었으며, 2001년 제주대학교에 매각된 뒤, 2002년 7월 현재의 아라동 부지에 새롭게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제주의료원은 지금의 중앙성당 부근, 제주시 구도심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관덕정과 병원 사이에 있었고, 그 골목은 우리 형제의 놀이터이자 삶의 무대였다. 의사의 흰 가운과 간호사의 모습, 병원 앞에 세워진 짚차 한 대조차도 우리에게는 이국적인 풍경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 제주의료원은 제주의료사(濟州醫療史)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으로, 나의 유년 시절 기억 한편에도 깊이 스며 있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나는 다섯 살 무렵 백일해에 걸려 밤낮으로 기침을 멈추지 못했고, 어머니는 나를 자주 제주의료원으로 데려가셨다. 하지만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 특히 주사를 맞는 게 무서워서 울고 떼를 쓰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달래어 품에 안고, 병원을 들어섰다. 그때의 나를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풍경이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제주의료원은 도내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이자 도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유일한 의료기관에 가까웠다. 제주간호학교(현재 제주한라대학교의 전신) 학생들의 강의와 실습이 이루어지던 공간이기도 했다. 병원은 단지 치료의 공간을 넘어, 의료 인력의 꿈과 헌신이 자라나던 토양이었다.
세월은 흘렀고, 병원도 시대에 맞춰 변모해 갔다. 나는 2020년 9월부터 제주의료원 발전자문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병원의 발전과 미래를 위한 자문을 해왔으며, 2021년 9월부터는 이사로서 책임의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그렇게 다시금 병원이 내 삶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환자가 아닌 이사로서, 어릴 적 두려움 대신 이제는 사명감으로 병원을 마주하게 되었다.
제주의료원 신축 이전 42주년을 맞이한 이 여름날, 기념행사가 신성여자중학교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제주도의회 의원들과 지역 인사들, 병원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나는 초청 내빈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식전 행사로 제주의료원 중증장애인 연주단 ‘하음’의 공연이 펼쳐졌다. 장애를 가진 젊은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오케스트라의 울림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선 깊은 감동이었다. 독창과 합주가 이어질수록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열었다. 그들의 선율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연습과 고통 속에서 태어났는지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은 음악이었고, 동시에 삶이었다.
본행사는 근무 유공이 있는 우수 직원에 대한 표창과 재직기념패 수여, 기념사와 축사로 이어졌다. 단상 위에서 전해지는 말들은 단지 의례적인 행사를 넘어, 병원을 지탱해 온 사람들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였다. 병원이란 거대한 조직이 유지된다는 것은 곧 신뢰와 협력의 조율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
기념식이 끝난 뒤에는 ‘한마음 어울림 축제’가 이어졌다. 병원의 긴장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직원들이 함께 웃고 춤추는 그 시간은 참으로 귀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직원들을 격려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손을 맞잡고 마음을 전했다. 병원이라는 이름의 공간에 스며 있는 사람 냄새와 온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오래된 기억의 골목이 떠올랐다. 어머니 손을 잡고 병원을 피해 도망치려던 아이, 그리고 오늘 병원 사람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축하를 전하던 나. 그렇게 이어진 기억의 시간 속에서 제주의료원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 병원은 건물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라는 진실이 다시금 마음에 새겨졌다. 그리고 나는 오늘의 선율이, 병원 개원 100주년을 향한 울림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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